요한계시록을 공부하려면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몇 가지 개념들과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들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빛의 반대는 어둠, 선의 반대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빛의 반대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 없음’입니다. 빛은 측정이 가능한, 실존하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존재하지 않기에 측정하는 단위가 없습니다. 빛은 더 강한 빛, 더 밝은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칠흑과 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은 없습니다. 어둠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선이 없음’입니다. 선은 하나님입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실존하십니다. 악은 사탄이 아닙니다. 악은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 마귀, 귀신들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원래 천사장이었던 루시엘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보좌에 스스로 앉으려고 하나님을 대적했다가 쫓겨나서 루시퍼가 된 것입니다. 그때 루시엘과 동조해서 함께 쫓겨난 천사들이 바로 귀신들입니다. 사탄과 귀신들은 미혹하고 속이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음’이 악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우리의 영적인 면은 비는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빛이 없음, 하나님이 없음,’ 즉 악이, 어둠이 들어오게 됩니다. 비워두면 큰일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심판과 종말, 멸망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회복과 구원에 대한 책입니다. 심판에 대한 메세지가 상징들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예배에 대한 부분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상징들은 그대로 두십시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 예를 들어 666이나 짐승에 대한 숱한 해석들은 이미 틀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아무리 연구하고도 모르는 걸 자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내 나름대로 선하다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를 해치고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세지는 재림의 시기, 심판의 시기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세지는 “우리는 언제든지 준비하자. 이 마음을 계속해서 지니자”는 것입니다. 세상은 창세부터 악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재림하시는 걸까요? 세상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악해지고 타락해서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에 더 이상 기대하실 수 없을 때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들을 삼아 예수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박했던 부모님 세대의 신앙이 사라진 교회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사라진 교회들을 보시고 주님께서 “내가 직접 나서야겠구나”는 마음으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교회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됩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들도 분분합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요한계시록에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시려는 건 우린 결코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 충만함이 없이는 선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처음 지어시고 보기에 좋다고 하셨던 그 질서를 다시 만드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십시오. 요한계시록은 그 회복의 작업, 새로운 시작에 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회복되는 구원의 역사의 시작에 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서로 맞물립니다. 창세기 1-2장의 ‘죄없음, 마귀없음’과 계시록 21,22장의 ‘죄없음, 마귀없음,’ 창세기 3장 ‘마귀등장’과 계시록 20장의 ‘마귀퇴장,’ 창세기 4장 ‘가인이 아벨 죽임 – 최초의 살인’과 계시록 19장의 ‘예수 그리스도 짐승 죽이심’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 1-3장과 요한계시록 20-22장은 대칭을 이루며 시작과 끝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여줍니다. 회복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수요누리,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소망으로 늘 준비된 수요누리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10/23/2019 요한계시록 특강 1 (박용진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