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2019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 (창 22:1-5, 하신주 선교사님)
오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귀 안에서 사는 삶은 오히려 이해가 쉽습니다. 마귀 안에서 사는 삶은 나 중심적인, 죄와 연합된 삶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가치를 쫓아 살면서도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마귀 안에서 살고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합니다. 마귀 안에서 사는 삶에는 달콤함이라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내면에 일어나는 뭔가 역동적인 것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연단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지칭하면서 상당히 복잡하게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네 외동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네 아들, “그 애정으로 가득한 (아하브)” 그리고 “네 결합된 몸 (야히드)”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 애정으로 가득한 상태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것은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 “결합된 몸”의 상태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어느새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은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연합하고 자녀와 연합하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이어야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연합은 재앙입니다. 이러한 연합은 중독이며 우상이 되어 절대 절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돈, 마약, 게임, 음란 등등 사탄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주는 이 우상들은 달콤하며 엄청난 쾌락을 제공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걸 버릴 수 없게, 이걸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게 싫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쾌락은 달콤하지만 거기에는 어둠의 영, 우울, 무기력, 시기, 질투, 죽음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달콤함을 경험하며 죽을 뻔했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되면 비록 때때로 흔들린다고 해도 더 이상 세상의 달콤함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싸우며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매달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을 맛보지 못 했기에 세상의 시궁창 같은 쾌락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자고, 먹고, 누리는, 육체의 정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desire가 ‘결합된 몸’이 되었을 때, 숭배의 되상이 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숭배하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혈육에 대한 애정이 종교적 숭배심으로 결합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을 제거하시려고 단호히 “죽여라” 명하시며 혈육에 대한 애정과 종교적 숭배를 분리시키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군말없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나와 아이는 저기 가서 경배하고”라고 말합니다. 이삭을 죽이러 가면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삭을 경배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아이는 함께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할 때 아이들은 살아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할 때 남편은 살아납니다. 우상을 죽이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수요누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10/9/2019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 (창 22:1-5, 하신주 선교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