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7:11-22, 하신주 선교사님)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레위지파의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제사장을 비교합니다. 반복되어 나오는 레위지파 제사장이란 과연 무슨 의미입니까? 1) 레위 계열의 제사장을 통해서는 완전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11절). 죄와 허물 가운데 태어난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제사를 드려야 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2) 모든 인간은 죄악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성령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레위지파 제사장 역시 육체 가운데 태어났고 육체에 속한 규례를 따라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16절).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죄와 허물로 더러워진 육체에 부어지면 부대가 다 터진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율법이 설 수 있고 서야 합니다. 3) 육체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명은 약하고 효력이 없어 폐지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계명의 기준을 깨부신 것,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4) 레위지파 제사장은 맹세없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태어났기에 맹세할 수 없습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영원히 구원해주리라”는 맹세를 할 수 없습니다.
레위지파 제사장처럼 불완전한 제사장의 제사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내 본성과 육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을 빨리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못 하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본성은 절대로 믿음이 없습니다. 본성은 죄와 연합이 되어서 내가 죄인지, 죄가 나인지도 구별을 못 하게 만듭니다. 본성은 나를 끊임없이 죄악 가운데 끌어내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십자가에서 죄와의 분리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약속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예수님 – 나 – 본성’의 치열한 싸움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죄와의 분리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본성을 거슬러 꾸짖고 내쫓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본성을 사랑하는 열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착각합니다. 야고보서 1:2-4에서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말씀하십니다. 시험이 어떻게 기쁠 수 있습니까? 바로 나의 죄성이 드러나기에 감사이며 기쁜 것입니다. 이걸 내 죄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게 바로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원래 형편없는 사람임을 받아 들이는 순간 바로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본성을 꾸짖고 빛에 의해 드러내고 우습게 여기고 버리고 쫓아내야 합니다 (엡 5:10-14). 못 드러내는 것은 내 본성을 여전히 꼬옥 부여잡는 것입니다. 본성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에 다 드러낼 수 있고 칼을 잡고 난도질할 수 있습니다. 이걸 못 하고 본성을 사랑하기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체 가운데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다고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분노, 절망, 우울, 짜증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로 올려 드려야 합니다.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꾸짖는” 수요누리, 나의 본성이 빛에 의해 드러나기를 소망하며 서로를 권면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