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여성예배 설교 요약

10/30/2019 요한계시록 특강 2 (박용진 목사님)

요한계시록에서 배워야할 것은 신앙 자세의 회복, 바로 ‘이 마지막 때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재 모습은 대부분 무너진 폐허들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 외에 모든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두 가지를 느끼게 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이 땅에서의 삶이 안락하고 평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게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고난당할 때 제자들은 다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숨어있던 그들이 돌아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삶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처럼 담대한 신앙 생활을 하려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삶의 전환점이 되는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우리 역시 마지막 환난의 때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핍박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7:17, 21: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흘리는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책망을 먼저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악해지고 타락한 교회에 주님께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사라진 교회와 성도들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시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4:6-7). 일곱교회에 보내신 메세지들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무너진 부분을 어떻게 회복할지 배워야 합니다.

계 5:8, 8:3, 8:4에서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천사들이 금대접과 금향로에 담는 ‘향’이라고 언급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현재의 환난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배의 3요소는 말씀, 기도와 찬양입니다. 이 셋은 항상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서는 안됩니다. 완전한 예배의 회복이 바로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입니다. 완전한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눈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예배 가운데 이것이 끊임없이 연습이 되고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천국에서도 온전히 예배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세상의 환난과 핍박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계 9:6은 너무나 괴로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7년 환난의 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와를 유혹한 사탄의 미혹은 여전합니다. 무엇이든지 늘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사탄의 미혹을 조심하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어린양의 신부로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일곱 재앙을 맞이할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계 21:9-10). 이것이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도는 교인수를 늘리기 위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계시록의 많은 상징들, 천국의 모습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마십시오. 그곳에 어떻게 가야할 지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한 영혼이라도 재앙 가운데 들어가지 않도록 불쌍한 마음으로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바로 이 곳에서 완전한 예배의 회복을 꿈꾸기 원합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아버지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끊임없이 연습하고 훈련하며 세상의 핍박을 넘어서는 수요누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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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2019 요한계시록 특강 1 (박용진 목사님)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려면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몇 가지 개념들과 요한계시록에 대한 오해들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빛의 반대는 어둠, 선의 반대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빛의 반대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 없음’입니다. 빛은 측정이 가능한, 실존하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존재하지 않기에 측정하는 단위가 없습니다. 빛은 더 강한 빛, 더 밝은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칠흑과 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어둠은 없습니다. 어둠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선이 없음’입니다. 선은 하나님입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실존하십니다. 악은 사탄이 아닙니다. 악은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 마귀, 귀신들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원래 천사장이었던 루시엘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보좌에 스스로 앉으려고 하나님을 대적했다가 쫓겨나서 루시퍼가 된 것입니다. 그때 루시엘과 동조해서 함께 쫓겨난 천사들이 바로 귀신들입니다. 사탄과 귀신들은 미혹하고 속이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음’이 악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우리의 영적인 면은 비는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빛이 없음, 하나님이 없음,’ 즉 악이, 어둠이 들어오게 됩니다. 비워두면 큰일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심판과 종말, 멸망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회복과 구원에 대한 책입니다. 심판에 대한 메세지가 상징들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예배에 대한 부분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상징들은 그대로 두십시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 예를 들어 666이나 짐승에 대한 숱한 해석들은 이미 틀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아무리 연구하고도 모르는 걸 자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내 나름대로 선하다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를 해치고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세지는 재림의 시기, 심판의 시기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메세지는 “우리는 언제든지 준비하자. 이 마음을 계속해서 지니자”는 것입니다. 세상은 창세부터 악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재림하시는 걸까요? 세상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악해지고 타락해서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에 더 이상 기대하실 수 없을 때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들을 삼아 예수님께서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박했던 부모님 세대의 신앙이 사라진 교회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사라진 교회들을 보시고 주님께서 “내가 직접 나서야겠구나”는 마음으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교회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됩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들도 분분합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요한계시록에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시려는 건 우린 결코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 충만함이 없이는 선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처음 지어시고 보기에 좋다고 하셨던 그 질서를 다시 만드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십시오. 요한계시록은 그 회복의 작업, 새로운 시작에 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회복되는 구원의 역사의 시작에 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서로 맞물립니다. 창세기 1-2장의 ‘죄없음, 마귀없음’과 계시록 21,22장의 ‘죄없음, 마귀없음,’ 창세기 3장 ‘마귀등장’과 계시록 20장의 ‘마귀퇴장,’ 창세기 4장 ‘가인이 아벨 죽임 – 최초의 살인’과 계시록 19장의 ‘예수 그리스도 짐승 죽이심’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 1-3장과 요한계시록 20-22장은 대칭을 이루며 시작과 끝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여줍니다. 회복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수요누리,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소망으로 늘 준비된 수요누리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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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2019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롬 8:31-39, 하신주 선교사님)

상황과 형편이 괜찮아 보이는데도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의 대상은 바로 일그러진 자아상입니다. “너는 가치없어, 무능해, 바보야, 쓰레기야, 너 같은 건 살 필요가 없어” 등등의 판단, 정죄와 고소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죄를 하는 건 누구입니까? 바로 마귀입니다. 문제는 마귀의 정죄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죽을 힘을 다해 그냥 버티면서 맘과 몸이 무너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정죄와 고소를 하는 마귀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 주변 지인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우리는 더욱 상처를 받고 헤어나오지 못 합니다. 이와 같은 마귀의 공격은 묵상을 할 대상이 아닙니다. 무조건 쫓아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고소의 뒤에 서있는 것이 마귀임을 깨닫는 순간 이미 승패는 결정납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아들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감히 누가 우릴 대적하겠습니까?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은혜로 모든 걸 주셨습니다. 우리가 상황 가운데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다시 연약해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너를 의롭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야. 흔들리지마. 마귀를 쫓아내라. 너는 내 딸이다”라는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날 위해 간구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사역, 최고의 일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젖 먹은 힘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제발 마귀의 정죄를 들으며 그냥 참고 견디려 하지 마십시오. 대적하여 쫓아내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매달리십시오. 하나님의 보좌에 달려나가 기도하는데 목숨 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능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39절). 세상 다른 데는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아무 권세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잠깐만요, 하나님. 나중에 만나요. 지금은 잡지 마세요”라는 내 중심적인 생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나오지 마십시오. 이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게 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수요누리가 되기를 기도하며 사도바울의 말씀을 우리의 고백으로 올려드립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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